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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계획실행


저녁 6시, 길고 길었던 워크숍 첫날 공식 일정이 무사히 마무리 됐다. 다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나의 몸에 빙의한 민선 역시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가 컨퍼런스룸 앞에서 마주친 박 대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너무 황급히 자리를 피해서 혹시나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내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박 대리님 고생 많으셨어요.” 주변 사람들이 박 대리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그의 존재를 알아냈다. 물론 이름과 호칭 정도만 알 뿐, 정확히 자신의 딸 이나와 사위 정근과는 어떤 관계인지 파악하진 못했다. 그저 회사 동료로만 알고 있을 뿐. “어, 이나 주임. 오랜만에 나와서 어색하진 않았죠? 아까 나보고 좀 불편해하나 싶어서.” 민선이 걱정하던 대로였다. 박 대리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나를 보며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뇨. 전혀요. 제가 왜 불편하겠어요.” “흠... 그래요? 그렇담 다행이고. 그럼 우리 술 한 잔 할래요?” 박 대리는 김소현 대리가 지시했던 대로 남 과장과 이나에게 술을 진탕 먹일 계획이다. 그리고 끝내 이루지 못하고 남 과장에게 빼앗겼던 이나와의 잠자리를 꿈꾸는 중이었다. “아, 오해하지 말고. 둘이 마시자는 게 아니라, 남 과장님이랑 김 대리랑 같이요. 일 관련 의논할 것도 있고 해서. 괜찮죠?” 혹시나 남 과장이 소현의 술자리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기에 먼저 이나를 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까지도 소현의 계략이었다. “아, 네. 뭐... 나쁠 건 없죠. 그래요, 그럼.” 민선은 순간 당황했지만, 단둘이 마시잔 얘기도 아니고, 정근과 함께였으므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박 대리가 자신의 존재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의심을 거두려면 제안에 응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 좋아요. 잠깐만, 김 대리님이 어디 계시더라. 김 대리님!” 박 대리는 이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두리번거리며 소현을 찾았다. “박 대리님! 여기요, 여기!” 멀리 로비 쪽에서 소현이 손을 크게 흔들어보였다. 옆에는 남 과장과 김영만 본부장도 함께였다. 마침내 넷이 한 자리에 하게 됐다. 계획에는 없던 김영만 본부장도 함께, 다섯이었다. “아, 젊은이들 끼는 데, 내가 껴도 되나 모르겠어. 김 대리가 하도 한 잔 하자기에 끼기는 하는데. 난 돈만 내고 갈게. 허허.” 김영만 본부장은 그들 사이에 낀 것이 내심 멋쩍었는지 없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허허 웃어보였다. 김 대리가 무슨 꿍꿍인지 본부장까지 끼워넣어 조금 불편해진 자리지만 어차피 모두 회사 동료들이었기에 정근과 이나의 몸에 빙의한 민선은 별 거부감 없이 술자리에 합류하게 됐다. 워크숍이 열리는 리조트 4층 Bar. 남 과장, 주 주임, 김 대리, 박 대리는 김영만 본부장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 앉았다. “자, 오늘은 내가 비싼 독주로 한 턱 쏘겠어. 여기 끼워준 것만해도 고마워서 말이야. 허허허” 김영만 본부장은 한 병에 30만 원에 가까운 양주 한 병을 시켜 각자의 잔에 따라 주었다. 그리고 다섯은 이내 호기롭게 짠을 하며 첫잔을 원샷했다. “아흐~ 자기야. 속이 타 들어가는 거 같지 않아? 비싼 술은 다르긴 다르네요. 본부장님. 호호호~~” “크읍. 아후. 저는 독주는 잘 못 마셔서요. 너무 쓴데요.” 소현의 물음에 민선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원래의 이나였다면 이쯤은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민선은 술이라곤 와인 한 모금이 주량이었으므로 독주를 처음 마셔본 탓에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허허허. 주 주임. 쉬는 동안 변했네. 그 전엔 회식 때 폭탄주도 곧잘 마셔서 나도 주 주임 덕에 필름 끊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허허허.” 민선은 김영만 본부장의 말에 흠칫했다. 그랬다. 이나는 술을 잘 마시고 잘 받는 체질이다. 그걸 간과하고 반응하다니.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괜찮아? 같이 바람 좀 쐬고 올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근이 그런 이나가 안쓰러웠는지 등을 쓸어내리며 걱정의 눈빛을 보냈다. 그 모습에 정근의 맞은편에 앉은 소현의 눈은 질투에 불타고 있었다. “어후~ 닭살! 과장님. 집에서 맨날 보면서 여기까지 와서도 그렇게 티내면 사회생활 못한다고 소문나요. 떨어져요, 떨어져! 본부장님도 계시는데.” 정근은 김영만 본부장의 눈치를 보며 이나에게 하던 스킨십을 멈췄다. 소현이 늙수그레한 김영만 본부장을 데려온 이유였다. 둘이 스리슬쩍 사라지거나 스킨십 하는 꼴을 보기 싫어서다. “흠흠. 뭐 둘이 신혼 아닌가. 허허허. 난 괜찮네. 근데 이제 아주 신혼이라기엔. 허허허.” 김영만 본부장은 역시 꼰대였다. 본부장의 한 마디에 정근은 헛기침을 하며 이나와 조금 떨어져 앉았다. 얼마 후 인사고과가 있다. 그동안 시키는 일 밤낮없이 하다 고작 이런 일로 눈 밖에 나고 싶진 않았다. “아휴. 본부장님. 주 주임이 술을 잘 마시긴 해도 아직 술 맛 모를 20대 잖아요. 본부장님이 이해해주세요.” 정근도 어쩔 수 없는 일개 부하이자 가장이었으므로 이나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상황을 넘겨야만 했다. “아, 전 괜찮아요. 제가 술 맛을 잘 모르긴 해요. 본부장님 비싼 술 사주셨는데, 아까워요. 저는 그냥 맥주로 마실게요.” 민선도 눈치껏 행동했다. 그 말에 소현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럴래? 자기야 그럼 박 대리님도 술 잘 못 마시니까, 괜히 비싼 술 축내지 말고 저기 테이블가서 박 대리님이랑 맥주 마셔, 맥주. 맥주는 내가 쏠게. 그래도 되죠, 과장님~?” 소현은 작정한 듯 이나와 박 대리를 엮어 다른 테이블로 보낼 생각이었다. 정근은 박 대리와 이나가 단 둘이 술을 마신다는 게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공간, 시야에 보이는 곳이었으므로 참기로 했다. 여기서 또 한 마디 했다간 승진은 물 건너간다. 게다가 김 대리는 지난 승진에서도 자신을 도왔던 조력자이기도 했기에 이번 시간을 잘 보내야했다. 사실, 소현이 김영만 본부장을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 과장에게 술을 마시자고 하면 거절할 것이 뻔했기에 지난 과장 승진 때 일을 떠올린 것이다. 그땐 이나가 들어오기 전이었고, 남 과장이 남 대리, 자신이 김 주임이었을 때다. 그때부터 정근을 좋아하고 있었으므로 정근의 인사고과를 잘 받게 해주기 위해 윗 상사들에게 대신 정근의 인품을 칭찬하거나 술자리에서 정근의 능력을 띄워주곤 했었다. 그 덕만은 아니었지만 소현의 내조아닌 내조도 정근의 승진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정근은 지금 상황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술자리에 오기 전 소현이 김영만 본부장의 눈을 피해 정근의 귓가에 속삭인 말이 있었다. “과장님~ 오늘이 기회에요. 장영아 과장님이 요즘 본부장님한테 알랑방구 장난 아니라니까요. 성별이 다른 걸 무기로... 과장님이 먼저 올라가셔야죠.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소현은 여우 중에서도 상여우였다. 비록 정근을 이나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이번 기회로 다시 되찾아올 생각이었다. “아, 박 대리, 그럴래, 그럼? 주 주임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맥주 한 잔 하고 있어요.” 마침내 정근마저 이나와 박 대리가 함께 자리를 피해주길 청했다. 그 말에 박 대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김 대리였다. 일이 이렇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다니. “주 주임님, 저쪽 창가 테이블로 가실까요? 저기가 분위기가 좋네. 그리고 우린 상사분들 얘기 엿듣지 않는게 좋으니.” 모두의 청원대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민선은 못내 찝찝했다. 자리를 옮긴 뒤 박 대리에게 물었다. “근데, 김 대리님도 같은 대리님 아니에요? 박 대리님은 여기 계신데, 왜 김 대리님만...” “에이, 그거야. 저는 재무팀이고 저 두 분은 기획팀이잖아요. 제가 저기 껴봤자 기획쪽 일에 대해서 아는 것도 1도 없고. 저도 양주 못 마시기도 하고. 저기 껴서 뭐해요. 머리만 아프지. 자 마셔요.” 박 대리는 자연스레 맥주잔을 건네며 이나에게 마시길 권유했다. 오늘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이나 평소 주량으로 10잔은 마시게 해야 한다. “아, 저 술을 잘 못..아니, 오늘은 술이 잘 안 받아서.” 민선은 일단 한 발 뒤로 뺐다. 아무리 이나의 몸이지만 자신이 술 맛자체를 싫어하기에 도저히 마실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어어? 무슨 소리. 오늘 주 주임 왜 이렇게 수상하지?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박 대리는 어떻게든 술을 마시게 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진 것인데, 수상하단 단어에 민선은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고 맥주를 원샷했다. “크으! 그렇지! 이게 주 주임이지. 살아있네, 살아있어! 멋지다~ 주 주임! 브라보~!” 이나의 직장 동료만 아니었다면 바로 빈 맥주잔으로 저 새끼의 머리통을 후려갈겼을 것이라 생각하는 민선이었다. 그렇게 둘의 술자리는 점점 무르익기 시작했다. “어후, 왜 이렇게 취하지. 김 대리. 오늘 술 세다. 아주 못 당하겠어.” 한편, 김영만 본부장 테이블에선 김 대리의 작업이 한창이었다. 일부러 본부장 옆에 찰싹 달라붙어 술을 따르고 또 따랐다. 김영만 본부장이 술을 거절하려 할 때마다 몸을 밀착해 김영만 본부장의 팔 언저리에 가슴을 부벼댔다. “허허허, 김 대리. 아주 적극적이야. 이런 모습 아주 마음에 들어. 허허허.” 그럼 김영만 본부장은 못이기는 척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러기를 30여 분. 마침내 김영만 본부장이 인사불성이 됐다. “어, 본부장님. 괜찮으세요? 몇 호실 묵으시죠?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헤롱거리는 본부장의 모습에 정근이 벌떡 일어나 김영만 본부장을 부축했다. “어머, 어머. 본부장님 지금 올라가시면 어떡해요. 좀 아까 이 전무님 오시라고 연락드렸는데. 과장님, 지금 모셔다 드리는 동안 전무님 오시면 어떡해요. 어머 어떡해.” 이것도 소현이 계략이었다. 본부장보다 높은 전무를 불러낸 것이다. 그러나 전무는 끝내 오지 않을 것이다. 오늘 워크숍에 참가하긴 했지만 이미 근처 리조트 다른 본부 워크숍 뒷풀이에 참석한다고 떠난 후였기에. 예의상 인사치레로 몇 마디 건넨 것 뿐. 한 자리에서 끝장을 보는 전무의 특성을 감안하면 절대 나타날 리 없었다. 고로 술자리는 여기서 끝인 셈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정근은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박 대리! 잠깐만. 미안한데, 나 좀 도와줘.” 멀리 박 대리와 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정근은 박 대리에게 손짓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저기, 본부장님 좀 방에 모셔다드려. 난 전무님이 오신다고 해서 자리를 뜰 수가 없어서. 부탁할게.” 정근이 말하는 동안 소현이 박 대리의 팔꿈치를 살짝 꼬집으며 눈치를 줬다. 이행하라는 의미였다. “아휴, 전무님이 오신다고요? 그럼 당연이 제가 모셔다 드려야죠. 본부장님 1503호실에 묵으실 거예요. 아까 키 로비에 맡겨두시는 거 제가 봤거든요. 본부장님~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어어엇!” 박 대리가 김영만 본부장을 부축하는 척하며 다시 의자위로 털썩 앉았다.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그런가. 혼자 안 되네요. 김 대리님도 여기 자리 뜨시면 안 되죠? 누가 좀 더 도와줘야 하는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민선이 눈치껏 나서 나머지 한쪽을 부축하며 일으켰다. “으라차차차. 어, 고마워요. 주 주임님. 그럼 주 주임이랑 저랑 본부장님 방에 모셔다 드릴게요. 전무님이랑 말씀 잘 나누세요.” “어머, 그래요. 박 대리님 고마워요. 자기야. 자기 힘세다? 고마워. 맥주는 내가 계산할게. 얼른 모셔다 드려. 룸키는 로비에다 전화해서 1503호에 올려달라고 할 테니까 얼른 올라가봐.” 박 대리와 김 대리가 서로 북치고, 장구 치며 마침내 정근과 이나를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다. 민선은 힘겹게 본부장의 팔을 걸쳐들고 박 대리와 함께 1503호로 향했다. 1503호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고요했다. 본부장은 축 쳐진 채 잠에 빠져있었고, 박 대리는 그윽하게 이나를 응시했다. 민선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그런 시선을 느낄 겨를이 없는 상태였다. 띵- 마침내 15층이 되자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1503호 앞에 다라라 기다리고 있던 리조트 직원에게 열쇠를 받아들고 문을 열었다. “으쨔! 본부장님, 푹 주무세요.” 박 대리가 술에 취한 본부장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이나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1503호를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휴, 고생했어요. 본부장님 오늘 기분이 좋으셨나. 엄청 드셨네. 주 주임, 내려가서 맥주 마저 마실래?” 박 대리는 이나를 흘끔 쳐다보며 눈이 풀린 모습을 확인하자 슬쩍 반말로 술 자리를 제한했다. “아, 아뇨. 저 많이 마셔서.” “에이~ 뭘 많이 마셔. 김 대리가 맥주 쏘는 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거 아닌데. 한 잔 더 하지? 남 과장님도 아직 자리 파하시려면 한참 남은거 같은데?” 그말에 민선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래. 지금 그 여시같은 김 대리와 사위가 같이 있었지. 그 자리를 지켜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취한 상태였으므로 얼른 바깥바람을 쐰 뒤 다시 Bar로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바람좀 쐬고요.” 이나의 말에 박 대리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래? 같이 가죠. 나도 바람 좀 쐬고 싶긴 했거든.” 그렇게 둘은 컴컴한 밤, 리조트 밖으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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